제29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BIFAN)가 13일 열하루 동안의 축제를 마치고 폐막했다. 5년간 AI(인공지능) 필름메이커 1만 명을 양성하겠다는 목표를 내건 영화제는 3일 열린 개막식부터 달랐다.
포문을 연 AI 활용 영상(양윤호 감독 연출)은 불을 발견한 선사시대 인류가 산업·IT(정보기술) 혁명을 거쳐 AI 신인류로 진화하기까지를 담았다. 무용수 겸 안무가 최호종이 바통을 이어받아 ‘AI 휴머노이드’로서 무대를 꾸몄다. 배우 송승환이 총감독을 맡은 ‘AI 묵시록’이라는 이름의 10여 분의 개막 공연은 “예술과 기술의 교차점을 말하는 BIFAN의 정수를 표현해냈다”는 호평을 얻었다.
개막식의 일등공신은 지난 2월 BIFAN의 새 조직위원장으로 위촉된 배우 장미희(67)다. 그는 3개월 남짓의 준비 기간을 개막식 기획·섭외·준비에 매진했다. 장미희는 사회를 맡은 배우 강석우를 비롯해 송승환·최호종·양윤호 등을 한데 모은 장본인이다.
지난 10일 경기 부천시 한 카페에서 만난 장미희는 “적은 예산으로 구현 가능한 노력을 다했다”면서 “창의성과 상상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모이면 짧은 시간에도 예술성 있는 결과물을 도출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게스트 한 명, 한 명까지 출연진들의 입퇴장이 연출된 한 편의 공연 같은 개막식이길 바랐다고 한다.
장미희는 BIFAN과 연이 깊다. 2017~2018년에는 부조직위원장을 지냈다. 조직위원장 직을 수락하기까지 고민도 깊었다. “‘장’이 붙는 자리를 맡는 걸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에요. 제 성격상 책임 있는 자리를 맡으면 얼마나 헌신할지를 알기 때문에 쉽사리 ‘네,’ 할 수 없는 거죠.”
이장호 감독과 함께 한국영화 100년 기념사업회(2018~2019) 공동위원장을 맡아 한국 영화의 역사를 정리한 것은 장미희가 부천에 돌아올 결심을 하게 된 계기였다. 그는 “선배님들께서 식민지 개척 영화의 시대부터 (후대 영화인들을 위한) 카펫을 깔아주셨다는 것에 감사함과 존경심이 들더라”며 “(전 조직위원장) 정지영 감독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라고 했다.
그가 BIFAN에 몸담던 7년여 전과 지금 영화 산업이 마주하는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혹자는 ‘영화관이 아닌 휴대전화 속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로 영화 콘텐츠를 보는 것이 보편화한 시대에 영화제라는 행사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질문할지도 모른다. 장미희 또한 이를 고민했다고 한다.
“제 조카조차도 하나의 영화를 사람들이 한 장소에 모여서 관람하는 게 이상하다고 말하더군요. 새 세대가 콘텐츠를 소비하는 환경이 변했다는 건 인정해야 하는 거죠.”
다만 장미희는 여전히 영화관이 물리적 공간을 넘어 새로운 세계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곳일 수 있다고 본다. “이 영화제가 관객들에게 자유와 영감을 선물하는 곳이었길 바란다”는 그는 개막식을 BIFAN의 주제에 맞게 재편한 데에도 “영화제 기간 만큼은 ‘이상해도 괜찮은’ 다른 세계가 열린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AI 기술에 대해서도 “이미 엄청난 속도의 발전이 예측된 분야라면, 예술가들은 두렵더라도 빠르게 동승해 방향성을 제시해야 한다”고 했다. 예견된 미래에 AI 기술과 친해지고, 이를 활용해보고 그 지식을 창의력을 구현하는 데 활용하면서 역으로 AI 기술에 얽힌 도덕적 질문을 먼저 던지는 것이 창작자들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한국 영화와 AI 기술에 대한 비관적 전망이 난무하는 오늘날, 장미희가 말하는 미래의 ‘밝은 면’에 대한 확신은 오히려 신선하다. 50년 가까이 배우 생활을 하고 30여 년 간 대학 교단(현 명지전문대 명예교수)에 서서 문화예술업계의 고저를 지켜봐 온 그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장미희는 “지금 영화계가 당면하는 위기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며, 한국 영화인들에게는 투지가 있다”고 말한다. “식민지 시대부터 영화를 만들었고, 정치적 상황에 의해 (엄혹한) 시대를 겪었기에 사회 비평적 요소를 갖춘 날카로운 창작 정신의 뿌리가 굳건하다”는 것이다.
1976년 영화 <성춘향전>으로 데뷔한 장미희는 배우 생활 50년 차인 올해 대한민국예술원(예술원) 신규 회원으로 선정됐다. 30년 경력 이상의 예술인 중 추천을 받아 100명 정원(현재 총 82명)을 선발하는 예술원의 회원이 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가 가야 할 길의 마지막 문을 두드렸고, 나를 받아주셨구나”라는 생각에 감격스러웠다고 한다.
장미희가 지난 50년 간 출연한 작품은 총 93편(연극 2편, 영화 45편, 드라마 46편)이다. 예술원에 제출할 증명 서류 폭만 해도 한 마디 이상으로 두꺼웠다는 그는 “적어도 게으르지 않았다는 증명 같았다”고 했다. 집과 일(현장), 학교만을 오간 삶이었다.
그는 배우 장미희의 진면목을 발견한 <겨울 여자>(1977)을 시작으로, <속 별들의 고향>(1978), <느미>(1980), <황진이>(1986), <적도의 꽃>(1983), <깊고 푸른 밤>(1985) 등을 필모그래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영화라고 했다. 드라마로는 김수현 작가의 작품에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이 뜻깊었다고 한다.
장미희는 예술원 회원이 된 마음을 800㎞에 달하는 유럽 산티아고의 순례길의 종착지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해 큰절을 올리는 이들의 심경에 빗댔다. “매일 수준이 얕을 땐 얕은대로 최선을 다했고, 나아지면 나아지는대로 최선 이상의 최선이 무엇인가 궁금해하며 여기까지 왔어요. 그 꾸준한 두드림에 응답받은 기분입니다.”
장미희는 “누군가가 자신의 길을 50년 걸었다는 건, 혼자만의 힘으로 되는 일은 아니다”라며 “50년간 지켜봐 준 팬들을 비롯해 따뜻한 마음으로 저를 바라봐주셨던 모든 분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감사를 전했다. 그는 동시대의 대중들이 ‘장미희’라는 사람을 보면, 각자의 젊었던 나날을 떠올리면서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힘을 얻길 바란다고 했다. 그는 “제가 제 일을 열심히 하고, 반듯하게 살아갈 때 그 마음들이 지켜질 수 있다는 걸 안다”고 했다.
앞으로 연기자로서 배역을 맡게 된다면 “이제는 내 시대를 연기할 수 있겠다”는 기대가 있다. 열여덟 살 데뷔 이후 나이보다 성숙한 역할을 제안받았던 연기 인생이었다. 한 번에 여러 작품을 소화하느라 학교생활 등 평범한 10-20대를 즐기지도 못했다. 장미희는 “늘 내가 모르는 삶을, ‘알아야 하는 그녀’를 이해하기 위해 공부해야만 했었다”며 “이제는 나와 또래를 연기할 수 있는 편안함이 생겼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일단은 BIFAN 조직위원장 일에 집중할 생각이다. 3개월뿐이던 이번 영화제 준비 기간과 달리 제60회 BIFAN까지는 1년이 남았기에 더 잘해보고픈 마음도 있다. “다음엔 폐막식도 ‘판타스틱하게’ 바꿔볼까, 생각도 드네요. 상주고 끝이 아니라 ‘내년 7월에 만나자’는 즐거운 선언이 있는 자리라면 얼마나 멋질까요?” 장미희는 ‘아름다운 밤’을 상상하며 내년을 기약했다.
연일 이어지는 기록적인 폭염에 충남에서 온열질환으로 2명이 숨졌다.
9일 충남소방본부에 따르면 전날 오후 5시25분쯤 충남 서산시 고북면 신송리에서 논일을 하던 A씨(86)가 논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소방당국엔 “사람이 논에 빠져 죽은 것 같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열사병으로 숨진 것으로 추정되는 A씨는 이날 오전부터 논에서 일을 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현장에 출동한 구급대는 사후경직이 진행 중인 A씨를 발견하고 경찰에 인계했다.
앞서 약 4시간 전 오후 1시26분쯤 충남 공주시 의당면 오인리에서도 논일을 하던 B씨(96)가 열사병으로 숨졌다.
소방대원이 출동했을 당시 이미 B씨는 의식과 호흡이 없고 심장이 수축해 있었다.
충남소방본부 관계자는 “현장에 도착했을 당시 B씨가 쓰러진 지 꽤나 시간이 지난 것으로 보였다”며 “사후경직도 온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 측이 9일 법원의 영장실질심사(구속 전 피의자 심문)에서 조은석 내란 특별검사팀이 구속영장 청구서에 담은 혐의에 대해 “내란죄에 포섭돼 별도로 범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윤 전 대통령 측은 이날 오후 2시22분부터 오후 9시까지 서울중앙지법에서 남세진 영장전담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영장심사에 167쪽 분량의 PPT를 준비해 이같이 주장했다. PPT에는 윤 전 대통령 구속영장 청구 혐의 가운데 체포영장 집행 저지와 관련한 반박 내용이 가장 많이 담겼다. 윤 전 대통령 측은 68쪽짜리 의견서도 법원에 제출했다. 김홍일·배보윤·송진호·채명성·최지우·김계리·유정화 변호사 등 7명이 법정에 나왔고, 윤 전 대통령도 직접 출석해 최후진술을 했다.
윤 전 대통령 측은 “특검이 범죄사실로 기재한 국무회의 심의 방해, 허위공문서 작성, 외신대변인을 통한 공보, 비화폰 통화내역과 관련한 행위들은 내란 혐의와 동시 또는 수단과 결과의 관계에 의한 행위로 재구속 제한 사유에 해당한다”며 “대법원은 내란죄의 성립을 전제로 하고 있는 개별행위들은 내란죄에 포섭돼 별도로 범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라고 밝혔다. 윤 대통령 측은 체포 방해 혐의에 대해서는 “이미 대통령경호처 간부들에 대한 4차례 구속영장 청구 과정에서 범죄 성립에 다툼이 있다는 검찰과 법원의 판단이 있었다”고 했다.
윤 전 대통령 측은 비상계엄 선포 전 국무회의와 관련해 “윤 전 대통령은 신속성과 밀행성을 중시하며 최대한 빨리 올 수 있는 국무위원들을 순차로 소집했다”며 “특정 국무위원은 오지 못하게 하거나 회의 참여를 불허한 것이 결코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윤 전 대통령 측은 “국무위원의 심의권이 침해됐다는 것은 역대 국무회의 중 가장 실질적인 논의가 이뤄졌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라고도 주장했다.
윤 전 대통령 측은 윤 전 대통령이 계엄 후에 허위 계엄 선포문을 작성했다가 폐기한 혐의와 관련해 “직무 권한도 없는 공무원(강의구 전 대통령실 부속실장)이 서류가 아니라 ‘표지’에 불과한 문건을 만든 것은 공문서가 아니며 대통령기록물도 아니다”라며 “부속실장 서랍에 단순히 보관하고 있다 폐기했던 ‘표지’에 불과한 문건이 어떻게 ‘행사의 목적’으로 만든 ‘서류’라고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고 밝혔다.
윤 전 대통령 측은 윤 전 대통령이 대통령실 해외홍보비서관을 통해 외신에 계엄 정당성을 허위로 홍보하도록 지시한 혐의와 관련해 “외신 대변인은 비상계엄 선포, 국회에서의 비상계엄 해제 의결, 대통령의 비상계엄 해제의 과정을 공보하며 대한민국의 헌정 시스템이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공보했다”며 “대변인의 공보 활동이 직권남용에 해당한다면, 국민들이 경제의 어려움을 체감하고 부동산 가격 상승에 고통받고 있을 때 ‘대한민국 경제는 튼튼하다’는 대통령 대변인의 발표 역시 직권남용죄로 처벌돼야 한다”고 했다.
윤 전 대통령이 체포영장 집행을 방해한 혐의와 관련해 윤 전 대통령 측은 “공수처와 경찰에 의한 공무집행 적법성에 대해 많은 다툼이 있다”며 “윤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취소 결정에서도 단순히 구속기간에 있어서 시간과 날짜의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절차적 문제점 역시 지적됐다”고 밝혔다. 윤 전 대통령 측은 “잘못된 공무집행을 한 공수처와 경찰에 대한 수사는 전혀 하지 않고 체포 방해 행위만을 문제 삼는 것은 가해자에 의한 피해자 수사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윤 전 대통령 측은 특검이 구속이 필요한 사유로 든 도주 우려와 관련해 “전직 대통령에 대한 도주 우려는 그 자체로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윤 전 대통령은 직에서 물러나 아무런 힘도 없다”고 했다. 윤 전 대통령 측은 “전직 대통령으로서 상시 경호를 제공 받고 있으며 출국금지가 돼있는 상황에서 도망갈 곳은 없다”며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에도 어떠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윤 전 대통령이 형사재판에 승복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떠한 근거에서 나온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윤 전 대통령 측은 특검이 ‘서울서부지법 난동 사태’를 거론하며 ‘지지자들을 동원한 집단 범행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 데 대해 “윤 전 대통령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법부의 결정에 대해 물리력을 행사하는 것을 선동하거나 교사한 사실이 없다”고 했다.
윤 전 대통령 측은 “‘탄핵됐으니 유죄이고, 유죄이니 구속돼야 한다’는 주장은 법치주의를 부정하고 대한민국을 전체주의적 권력 남용의 시대로 되돌리는 위험한 사고”라며 “정치적 중립성과 업무의 공정성을 담보해야 할 특검이 가장 정치적이고 편향된 수사를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제26회 서울퀴어퍼레이드가 열렸던 지난달 14일은 하루종일 비가 올 거라고 예보됐던 날이었다. 걱정이 무색하도록 하늘이 맑았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무지개 깃발이 나부끼는 풍경은 예뻤지만 정말 더웠다. 전날 내린 비 때문에 아스팔트 도로에서는 열기와 함께 습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한 참가자의 투덜거림을 듣고서는 ‘웃참’에 실패했다. “아니 나는 퀴어 당사자니까 왔는데, 이 날씨에 여기에 오는 앨라이(성소수자들의 지지자)들은 진짜 대단하다.” 퀴어퍼레이드 단골 참가자들은 ‘퀴퍼 날은 항상 덥다’고 입을 모은다. 그럼에도 이들이 매년 거리에 나오는 이유는 어디에도 없는 것으로 치부되는 성소수자 집단의 존재를 가시화하는 것 자체가 저항이기 때문이다. 이날도 70여개 부스가 차려진 5차선 도로는 참가자들로 북적였다. ‘우리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고 쓴 피켓을 들고 행진했다.
퀴어 당사자는 아니지만 퀴어퍼레이드에 갔던 것은 전국언론노동조합이 사상 처음으로 낸 공식 부스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언론의 성소수자 관련 보도가 차별과 혐오를 재생산하지 않도록 하고, 퀴어 동료들과 함께 일하는 현장을 안전하고 평등하게 만들겠다는 취지라고 이해했다. 매달 조합비를 내는 조합원으로서 반갑고 기뻤다.
무지개색 부채와 귀여운 병따개 ‘굿즈’를 나눠주며 부스를 방문한 사람들을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언론노조 부스에서는 ‘최악의 성소수자 보도 헤드라인 고르기’, ‘언론에 바라는 점 포스트잇 붙이기’ 행사가 진행됐는데, 스티커를 붙이는 판에 자리가 남아나지 않을 정도로 사람이 많이 몰렸다. 방문객들은 연신 부채질을 하면서도 긴 줄을 서길 마다하지 않았다. 포스트잇을 받아들고 어떤 의견을 적을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빼곡하게 붙었던 포스트잇에서 인상적이었던 내용들을 옮겨보면 이렇다. “어떡하죠, 우리는 세상 곳곳에 있는데요”, “나의 존재는 너의 기삿거리가 아니다”, “그냥 다 같은 인간으로 보세요”, “인권 앞에 기계적 중립은 없다”, “혐오의 확성기가 되지 마세요” 누군지 모를 동료들의 메시지도 있었다. “방송국에도 퀴어 많아요”, “커밍아웃하고 싶어요. -현직 기자-” 이날 참가자들이 최악의 헤드라인 1위로 꼽은 제목은 <“동성애 막아내는 방파제 되자” 20만명 서울 도심서 함성> 이었다. 이날도 ‘방파제’를 자처한 개신교계 단체들은 어김없이 ‘동성애 반대’ ‘동성애 싫어요’ 등의 피켓을 들고 집회를 열었다.‘
“모든 인간이 동성애를 택했을 때 인류가 지속가능하지 못하다”는 김민석 국무총리의 2023년 발언이 알려진 것은 공교롭게도 퀴어퍼레이드 다음 날이었다. “사회 분위기 때문에 동성애가 확산되는 것에 대해서는 지적하고 비판할 자유가 보장돼야 한다”는 게 근거였다. 어제 동성애 축제에 다녀왔으니 이제 나도 분위기를 따라 동성애자가 되는 건가. 이렇게 이성애가 판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사는 동성애자들에게는 도대체 왜 이성애가 확산되지 않는 걸까. 동성혼을 허용한 국가들 중에 한국보다 출생률이 낮은 나라가 없던데…
[플랫]‘동성애 혐오’ 묻지 않은 김민석 청문회···차별금지법 ‘모르쇠’는 여야 한마음
[플랫]“사랑은 사랑이다”…대만 퀴어퍼레이드가 축제인 이유
시덥잖은 생각이 꼬리를 무는 와중에 그가 다음날 외신기자간담회에서 했다는 발언에는 진심으로 충격을 받았다. 김 총리는 “차별금지법을 본인의 인권과 관련해 절박하게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고, 자신의 개인적이거나 종교적인 신념에 기초해서 차별금지법을 비판할 때 자신이 처벌받는 것 아닌가 하는 절박한 반대의 목소리가 있다”며 “이 두 가지 본질적인, 헌법적 목소리에 대한 대화가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국회에 제출됐던 법안 중 ‘차별금지법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처벌한다는 내용이 있는 법안은 없으니 사실관계부터가 틀렸다. 다 떠나서 ‘특정 집단을 차별할 자유’라는 것이 민주공화국의 시민에게 부여된 헌법적 권리라고 볼 수는 없다.
국무총리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는 어떤 국회의원도 여기에 대해 질문하지 않았다. 한 글로벌 리서치기관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중 성소수자 비율은 약 6%라고 한다. 유권자 중 6%를 계산하면 약 266만명으로 대구광역시 인구보다 많다. 이 정도 규모의 유권자 집단이 ‘가시화되지 않은 성소수자’가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무시당했을지 의문이다. 김 총리는 취임식에서 “사회적 약자를 한 명도 남기지 않고 구하겠다”고 했다. 그가 말한 사회적 약자에 여러 가지 이유로 차별받는 모든 사람들이 포함됐길 바란다.
▼ 남지원 젠더데스크 somnia@khan.kr
문 정부 시절 집값 통계 싸고 2년 7개월간 무자비한 감사와 수사
“우릴 잡범 만들어” 국토부 등 트라우마…내부 불신 확대도 문제
[주간경향] 윤석열 정부는 집값이 폭등했던 문재인 정부 시절, 청와대 지시를 받은 국토교통부와 한국부동산원이 집값 상승률 통계를 조작했다고 의심했다. 집권 기간 내내 감사원과 검찰을 앞세워 감사·수사를 벌인 것이 이른바 ‘통계 조작 의혹’ 사건이다. 이례적으로 장기간 이어진 감사와 수사를 거치는 동안 해당 기관들은 초토화됐다. 업무에 차질이 생기는 것은 물론 직원들의 업무 의욕이 저하됐고, 무엇보다 내부 구성원들이 서로를 불신하게 됐다. 내부에선 “조직을 갈라친 악의적 감사였다”는 말이 나오고, 정권이 바뀌면 언제든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최소한으로만 일한다”는 무력감도 감돌았다.
지난 3월 대전지법 형사12부(재판장 김병만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문재인 정부 통계 조작 의혹 관련 공판에서는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된 윤성원 전 국토교통부 차관의 주요 진술이 나왔다. 문재인 정부 청와대와 국토부에서 일한 고위 관료들은 정부의 부동산 대책이 효력이 있었던 것처럼 만들기 위해 부동산원의 주간 주택가격 변동률을 125회에 걸쳐 조작한 혐의로 무더기 감사를 받고 기소된 바 있다. 윤 전 차관도 이중 하나다.
검찰은 윤 전 차관이 청와대 주택도시비서관으로 일하던 2018년 당시 부동산원 원장과의 저녁식사 자리에서 통계 조작을 지시했다고 범죄일람표에 기재했다. 하지만 이 내용은 사실이 아니었다. 윤 전 차관이 법원에 사실조회를 통해 확인한 내역에 따르면 검찰이 주장한 저녁 식사일에 윤 전 차관은 다른 일정을 수행했다. 윤 전 차관은 이러한 내용으로 검찰 수사 과정에서 이미 밝혔음에도 검찰은 사실 확인 없이 기소를 밀어붙였다. 감사원은 윤 전 차관에게 단 한 차례도 해명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감사원의 ‘통계 조작’ 감사는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지 4개월 반 만인 2022년 9월 26일 시작됐다. 초반에는 통상적인 정책감사로 여기는 분위기가 짙었다. 국토부는 이미 4대강 정책 등으로 여러 차례 정책 감사를 받아본 적이 있었다.
상황이 심상찮다는 걸 느낀 건 감사원의 감사 담당 부서가 재정경제감사국에서 특별조사국으로 바뀌면서다. 특별조사국은 검찰로 치면 특수부 같은 곳이다. 전문 분야가 따로 없이 공직자 감찰과 함께 사회적 쟁점이 되는 사안에 대해 기동 감사를 실시한다. 출석 조사 횟수, 감사의 밀도 모두 강도가 세졌다.
당시 감사를 받은 한 실무자는 “통상은 감사원에서 반나절 정도 부처로 찾아와 감사를 진행하는데 이번 감사는 주 1회 명동에 있는 조사국으로 불려가 오전 9시부터 밤 11시까지 종일 조사가 진행됐다”고 말했다. 피감사자들은 감사 방식이 “비인격적”이었다고도 했다. 국토부 감사 대상자 여럿을 동시에 불러 각자 방에 넣은 다음 문을 모두 열어둔 채 감사가 이뤄졌다. 조사 내용이 서로 들리도록 해 진술시 압박감을 높이려 했던 취지로 풀이된다.
감사관의 질문은 비슷했다. 통상 정책감사는 행위를 한 사람을 먼저 지적한 뒤 윗선에 대한 관리 책임을 묻는다. 하지만 ‘통계 조작’ 감사는 반대였다. 처음부터 윗선의 지시를 파고들었다. 피감사자들은 유도신문도 많았다고 입을 모은다. “그쪽에서 말해요, 앞길이 창창한 분이 이렇게 나오시면 안 된다고. 공무원 입장에선 굉장한 압박감을 느낄 수밖에 없죠.”
국토부 내에선 이번 감사를 두고 “카카오톡 감사”라고도 부른다. ‘조작’을 했다는 감사원의 주요 근거 자료가 공무원들끼리 대화한 카카오톡이 됐기 때문이다. 감사원은 자료 제출을 요구할 때 서면으로 요구하는 것이 원칙이다. 개인 정보나 사생활 관련 자료가 폭넓게 들어 있는 휴대전화 임의제출 요구는 극히 이례적이다. 공무원들은 그러나 감사원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한 국토부 피감사자는 “감사원은 공무원 사회에서 갑 중의 갑”이라며 “변호인을 대동하거나 휴대전화 임의제출을 거부하면 눈 밖에 날 것만 같았다”고 말했다.
반대로 ‘윗선’의 경우는 감사 자체가 부실하게 진행됐다. 실무자의 진술을 얻어낸 뒤, 지시했다는 윗선에 대한 조사는 요식적으로 진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재판에 넘겨진 전 청와대 인사는 “이틀 감사를 받고 이틀 수사를 받은 뒤 기소됐다”며 “오히려 재판이 시작되고 내 혐의가 무엇인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직위 해제 처분도 이례적이었다. 2023년 10월 13일 1급 공무원 2명에 대한 직위 해제가 결정됐다. 감사원의 수사 의뢰로 검찰이 수사를 개시하면서다. 하지만 이는 국가공무원법 제73조의 관련 규정에 맞지 않는다. 규정상 직무수행 능력이 부족하거나 근무성적이 극히 나쁜 자, 파면·해임·강등 또는 정직에 해당하는 징계 의결이 진행 중인 경우, 형사사건으로 기소된 사람 등에 대해 직위 해제가 가능하다. 당시 직위 해제된 한 인사는 “1급 이상 공무원의 임명권자인 윤석열 전 대통령 재량권으로 직위 해제 됐다. 월급이 확 줄고 겸직도 할 수 없어 일상이 황폐해졌다”고 말했다.
감사가 종료된 건 2년 7개월 만인 올해 4월이다. 윤 전 대통령 재임 기간 내내 감사가 진행된 셈이다. 당사자들은 지금까지 직위 해제 상태로 언제 끝날지 모르는 법정 다툼을 하고 있다. 이토록 오랜 기간 감사가 진행된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한 감사원 관계자는 “연간 감사 계획을 짜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감사 기간은 1년을 넘지 않는다”고 말했다.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 소장은 “부동산원 자료는 부정확하고 (당시 비교가 됐던) KB 자료는 정확하다는 전제 속에 통계 조작이라는 자의적인 판단이 개입됐다”며 “통계 조작 감사가 정치적으로 활용된 측면이 있다”고 했다. 감사원의 통계 조작 사건 중간 조사 결과는 2023년 10월 재보궐선거 직전, 최종 결과 보고서는 올해 대선 전에 나왔다.
감사는 종료했지만, 국토부 내부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장기감사 후유증은 피감사자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았다. 조직 전체에 위화감도 조성했다. 휴대전화 포렌식이 대표적이다. 내부에선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 1년에 한 번 휴대전화를 바꿔야 한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돌고 있다.
지난 정부에서 일했던 것 자체가 주홍글씨가 돼 인사상 불이익을 받는 사람들이 생긴 것도 문제다. 주택정책을 총괄하는 핵심 라인이 초토화하면서 내부에선 일을 의욕적으로 할 동기 부여가 사라졌다. 한 과장급 공무원은 “불과 5년 전만 해도 대통령실로 오라는 제의를 거절한 사람이 없었는데 지금은 일부러 피하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한 실무자는 “무자비한 감사를 받고 난 뒤 조직 내 최고의 선택은 ‘아무것도 제대로 안 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최 소장은 “통계 조작 사건은 통계조사 결과를 확인하는 과정을 문제 삼는 수사와 감사였다. 이제 누가 정확하게 숫자를 확인해보려고 나설 수 있겠나. 공직사회가 일을 하지 않게 된 게 이번 감사의 가장 큰 문제”라고 말했다.
조직이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고 분열된 것도 문제다. 감사 과정에서 이름도 가리지 않은 채 직원들이 사적으로 나눈 카카오톡 메시지가 여과 없이 공개되면서 서로 간 신뢰에 금이 가기도 했다. 한 직원은 “감사가 진행된 지난 정부 3년 동안 직원들에게 연락도 잘 못 했고 오는 연락도 없어 외톨이처럼 지냈다”고 말했다.
감사를 받은 직원들은 일제히 말한다. 차라리 정책을 잘못 써서 비판받는 것이라면 감수하겠다고. 문재인 정부는 집권 기간 부동산 대책을 30개 가까이 발표하며 집값 잡기에 열을 올렸지만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국토부 공무원들은 “통계가 문제 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감사원이 우리를 잡범으로 만들어놨다”고 입을 모은다.
재판을 받고 있는 고위 공무원의 말이다. “제대로 된 감사였다면 통계를 만드는 기관과 발주 기관이 너무 가까이 있다는 구조적 문제를 문제 삼았을 텐데, 감사 결과는 전혀 그 방향이 아니다. 내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선 차라리 해임 징계받고 나오는 게 낫다. 하지만 30여년 공직생활을 한 조직에서 이런 방식으로 나오는 데 모멸감이 커 그 선택도 하지 못한다. 윤석열 정부의 감사와 수사는 공무원의 영혼을 갉아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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